벤자민 버튼, 거꾸로 가는 시간 속에서도 똑같이 흐르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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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 거꾸로 가는 시간 속에서도 똑같이 흐르는 인생
우리는 정말 벤자민 버튼을 ‘특별한’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읽고 나서, 저는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분명 70세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갓난아이가 되어 생을 마감하는 ‘역행하는 인생’을 그린 소설인데, 왜 이렇게 평범하게 느껴지는 걸까요?
대부분의 영문학 비평은 벤자민 버튼의 생애를 ‘특수한 것’, ‘일반적 시간관념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오히려 저는 이 작품이 인간 생애의 보편적 궤적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노인으로 태어났지만, 여전히 ‘무력한 아기’였던 벤자민
생각해보세요. 벤자민은 분명 70세 노인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그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의 상태는 어땠나요?
- 완전히 무력한 존재로 태어남
- 부모의 전적인 돌봄이 필요
-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 세상에 대한 이해도 전무
이거… 일반 아기와 뭐가 다르죠?
겉모습만 노인일 뿐,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탄생’의 무력함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잖아요. 주름진 피부와 흰 수염이라는 포장지만 다를 뿐, 그 안의 내용물은 동일한 거예요.
장년의 몸을 한 소년기, 그리고 인생의 정점
벤자민이 점점 젊어지면서(실제로는 성장하면서) 맞이하는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면 더 명확해집니다.
40-50대의 몸을 가진 10-20대 시절:
- 활발한 활동력
- 세상에 대한 호기심
- 첫사랑과 열정
- 미래에 대한 기대감
20-30대의 몸을 가진 중년 시절:
- 인생의 전성기
- 육체적, 정신적 절정
- 가장 많은 것을 성취
- 최고의 통제력과 자유
보세요. 이건 그냥 일반적인 인생의 궤적이잖아요?
벤자민의 인생이 거꾸로 흐른다고들 하지만, 실제로 그가 경험하는 것은 무력함→성장→전성기→쇠퇴→죽음이라는, 우리 모두가 겪는 바로 그 과정입니다.
소년의 몸으로 맞이하는 노년, 그리고 요람으로의 회귀
특히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죠.
벤자민은 갓난아이가 되어 요람(crib) 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아, 정확히는 소설에서 “fade out”이라고 표현하죠. 죽었다고 명시하지 않고요.
여기서 저는 영어 관용구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From cradle to grave”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런데 벤자민은? From cradle to cradle입니다.
요람에서 시작해서 요람으로 끝나는 인생. 이게 정말 아이러니일까요? 아니면 모든 인간이 결국 돌아가는 무력함의 순환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일까요?
“Fade out” - 정말 끝일까?
소설은 벤자민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fade out” 했다고 할 뿐이죠.
영화에서 fade out은 화면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fade out 다음에는 뭐가 올까요? 때로는 fade in이 따라오죠.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War das das Leben? Wohlan! Noch einmal!” (이것이 삶이었나? 좋아! 다시 한 번!)
벤자민이 갓난아이가 되어 사라진 그 순간, 정말 끝일까요?
어쩌면 다시 노인으로 태어나는 새로운 사이클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이번엔 정상적으로 아기부터 시작하는 인생일지도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소설도 말해주지 않거든요.
특별함 속에 숨겨진 평범함, 그것이 진짜 메시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피츠제럴드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시간을 거스르는 특별한 인생’이 아니었다고요. 오히려 어떤 방향으로 시간이 흘러도 결국 인간의 삶은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는 것.
무력하게 태어나, 성장하고, 전성기를 맞고, 쇠퇴하며, 다시 무력하게 돌아가는.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는 특수한 것 같지만 보편적이고, 비극적인 것 같지만 자연스럽고, 역행하는 것 같지만 실은 똑같이 전진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벤자민 버튼을 ‘특별하다’고 부르는 건, 혹시 우리 자신의 평범한 인생을 직시하기 싫어서가 아닐까요?

출처 표기: 이하나 · 수정 / 2차 저작물 작성 시 동일한 라이선스로 공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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